생애 후반기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능력 위주의 행정과 정복 활동
황제가 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오랜 로마 황실과 귀족의 부정부패를 일소하였고 귀족 계급을 견제하였다. 군사적으로도 그는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우수한 장군을 등용하여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많이 회복하였고 특히 이탈리아반도 본토를 회복하는 데 노력하였다.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아내었고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교회
그는 정력적으로 일하는 황제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며 수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세 차례에 걸쳐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단성론 문제로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교회의 교리와 이론을 정리하였다. 특히 그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비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건축하는 등 위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다.
로마법 대전
로마법은 이미 한 세기 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집대성을 시도하여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법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 체계화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529년 트레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한 후, 그의 지휘 아래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오랜 기간의 연구 작업을 거쳐 흔히 《로마법 대전》이라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19세기 독일의 법사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말했다. “로마는 세계를 세 번 지배했고, 수많은 민족을 세 번 결합하여 통일했다. 첫째, 로마가 가장 강성했을 때 여러 국가를 통일했다. 둘째,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교회들을 통일했다. 셋째, 중세에 계승되어 서양 법의 근간을 제공할 로마법 체계를 발전시켰다. 첫 번째는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로 한 통일이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통일은 정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가 세계사에서 갖는 의미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족적 원리를 보편성의 사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다.” 로마법은 로마제국이 인류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다.[12]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테오도라의 반란 진압
542년 봄 선페스트로 인한 역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쳤다. 재무관 트리보니아누스를 비롯하여 시민 23만 명이 죽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다. 후사가 없었기에 군대와 관리들이 크게 동요했다. 메소포타미아 전선에 파견되어 있던 당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몰아낼 생각은 없었으나, 부제스 등 몇몇 장군을 규합하여 황제 사후에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선동했다. 테오도라 황후는 수도의 근위병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후 벨리사리우스와 부제스를 즉시 소환했다. 황제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두 장군은 소환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부제스를 황궁 지하 감옥에 28개월 동안 감금했고, 벨리사리우스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해서 모반의 여지를 없앴다. 그사이에 황제는 결국 회복되어 일어났다.[13]